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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의공 엄흥도 | 단종 엄흥도 묘소위치 동상 기념관 정려각

by 핫피플나우 202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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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의공 엄흥도 | 단종 엄흥도 묘소위치 동상 기념관 정려각

- 충의공 엄흥도 단종 묘소위치 동상 기념관

 

충의공 엄흥도 인물 소개

엄흥도는 본관 영월 엄씨 군기공파 충의공계로 전해지는 조선 초기 인물입니다. 정확한 생년은 기록이 분명하지 않지만 1404년경 출생, 1474년경 별세한 것으로 추정되며 향년 약 70세로 전해집니다. 당시 신분은 영월 지역의 호장으로, 중앙 권력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으나 지방 행정을 담당하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엄흥도의 삶은 정치적 성공보다 ‘의리’로 기억됩니다. 세조 집권기라는 살벌한 권력 재편 속에서 대부분의 관리와 백성은 몸을 낮추고 침묵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엄흥도는 임금을 임금으로 예우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인물로 평가됩니다. 

 

훗날 영조 대에 공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에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지방 아전 출신 인물에게 내려진 이 같은 예우는 엄흥도의 선택이 얼마나 상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단종 유배와 죽음

1455년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는 조카인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했고, 이후 노산군으로 강등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밀려난 단종은 결국 1457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문제는 장례였습니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단순한 처벌을 넘어 가문 전체의 멸망을 의미하는 극형이었습니다. 왕의 죽음을 알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월은 침묵에 잠겼고, 두려움은 슬픔보다 컸습니다. 그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단종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이자 인간적 비애로 남게 되었습니다.

 

단종과 엄흥도

이 침묵을 깬 인물이 바로 엄흥도였습니다. 엄흥도는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시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닌 ‘임금에 대한 도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결단으로 전해집니다.

 

엄흥도는 아들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발각될 경우 즉시 처형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노루가 달아난 자리에 눈이 녹아 맨땅이 드러났고,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겨 그곳에 단종을 안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숙종 대에 단종이 복권되면서 장릉이 정비되었고, 엄흥도의 충절 역시 재조명되었습니다. 정조는 단종 충신들의 공훈을 정리하면서 엄흥도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엄흥도의 행동은 목숨을 바친 사육신과는 다른 방식의 충절이었지만, ‘장례를 지킨 충의’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엄흥도 묘소 위치 및 동상 기념관

엄흥도의 묘소는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에 전해지고 있으며,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조림산에도 관련 묘역이 있습니다. 단종의 능인 장릉 경내에는 충신각이 마련되어 있고, 영월 창절사에는 위패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또한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도 위패가 모셔져 있어 단종 충신으로서의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영월 일대에는 엄흥도 관련 기념 공간과 동상, 정려각이 남아 있으며, 후손들은 오랜 세월 단종 묘역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오늘날 영월을 찾으면 단종의 비극과 함께 엄흥도의 이름을 함께 만나게 됩니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선택, 화를 입더라도 옳다고 믿는 길을 택했던 결단. 충의공 엄흥도의 삶은 조선 시대 충절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름보다 행동이 먼저 기억되는 인물, 울림은 지금도 영월의 역사 속에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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