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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탄핵 사유
노무현 서거 16주기를 맞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노무현 대통령 프로필, 탄핵 사유, 재단, 서거일, 대통령 탄핵 헌법재판소 결과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프로필




- 이름 : 노무현
- 생년월일 : 1946년 9월 1일
- 서거일 : 2009년 5월 23일(노무현 서거 16주기)
- 고향 :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 사저 :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
-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 학력: 대건고등학교 졸업, 경찰대학 6기 학사, 고려대학교 법무대학원 법학 석사
- 가족: 아버지 노판석, 어머니 이순례, 큰형 노영현, 작은형 노건평, 누나 노영옥, 배우자 권양숙, 장남 노건호, 장녀 노정연
- 신체 : 키 168cm, 혈액형 O형
- 종교 : 무교
- 군대 : 육군 상병 만기전역
- 경력 : 인권변호사, 13대/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 16대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사법고시 합격


노무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노무현은 독학으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대학 졸업장 없이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노무현은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법조인의 문을 열었다. 정식 대학교육 없이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사법시험 합격 후 노무현은 제7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판사직을 2년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 부마항쟁


노무현 대통령과 부마항쟁의 연관성은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항쟁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은 부마항쟁 관련 사건의 변호를 담당하며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노무현은 부마항쟁 이후 발생한 다양한 정치사건에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변호를 맡았다. 특히 1981년 부림사건에서 노무현은 학생운동가들을 변호하며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에 맞섰다. 노무현이 담당한 부림사건은 부산지역 대학생들과 사회인사들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정권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노무현의 2002년 대통령 당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역전 드라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은 초기 지지율이 매우 낮았다. 당내 유력 후보들과 비교해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내세우며 기존 정치문법에 도전했다. 특히 영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호남 지역에서의 지지를 얻어내며 지역주의 벽을 허무는 모습을 보였다.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은 이인제 후보를 꺾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본선에서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범 민주진영의 결집을 이끌어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48.9% 대 46.6%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유 및 헌법재판소 결과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사례였다. 탄핵의 직접적 계기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3월 2일 기자회견에서 4월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발언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 발언이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은 이 외에도 경제정책의 실패, 측근 비리 등의 사안을 탄핵 사유로 제시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재적 의원 271명 중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고,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즉시 직무가 정지되었으며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5월 14일, 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탄핵을 기각했다.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된다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 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



2009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 40분경 고향인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발생했다.


200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들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치권 로비 의혹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과 측근들이 수사망에 포함되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박연차로부터 6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평소 청렴을 강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금전 관련 의혹에 대해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서거 당일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산책을 나간다며 집을 나섰고, 오전 6시 40분경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했다.
이상 노무현 서거 16주기, 탄핵 사유, 재단, 서거일, 대통령 탄핵 헌법재판소 결과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